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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발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찾은 김옥균의 한글 편지
2025년 6월 14일, 한국 근대사 연구에 중요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서 조선 후기 개화파 지도자이자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1851~1894)이 1884년에 작성한 한글 편지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 편지는 한국·일본 자료를 담당하는 오지연(영국명 지연 우드)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사서가 소장 아카이브에서 발견했으며, 김옥균이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해리 파크스는 주일 및 주중 영국 공사를 역임하며 동아시아 외교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편지의 내용
편지에는 '개국사백구십삼년 삼월념일'이라고 적혀 있어 1884년 4월 15일에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조선 오실 때 나는 일본에 있어 뵙지 못하고 섭하오. 당신이 조선 공사 하신 일은 조선을 위하여 경사롭소. 당신 생각은 어떠하신지 모르오나 나는 일본에 여러 번 와서 일본 사정을 대강 알거니와 일본이 전습을 개혁하고 나라 모양이 되기는 당신 공이 십분의 팔 분인 줄 내가 잘 알았소. 조선 일은 당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선은 십분의 십 분을 다 생각지 아니시면 어렵소. 내가 간사한 말 아니 하는 줄 응당 아실 듯하오. 아수돈씨한테 자세히 들으십시오."
김종학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서한에 나오는 내용, 필체 등을 볼 때 김옥균이 작성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며 "연구 가치가 큰 희귀한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편지의 역사적 의미
김 교수는 "청나라의 연호가 아니라 개국년도로 쓴 점은 독립을 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며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8개월 전에 작성된 서한으로 당시 영국 측의 협조를 얻으려 했던 증거이자 근대 외교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김옥균, 시대를 앞서간 개화의 선구자
출생과 성장 배경
김옥균은 1851년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김병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지만 크게 출세하지 못했고 시골에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 6세 때인 1856년 일가인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김병기는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킨 김상용의 직계 후손으로 여러 지방관을 거쳐 형조참의까지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양부를 따라 서울 북촌 화개동으로 옮겨왔는데 현재 정독도서관 자리에 그의 집이 있었습니다.
개화사상의 형성
김옥균은 자신처럼 북촌에 살고 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청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청에 들어온 서양의 근대 문물을 본 후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옥균을 비롯한 북촌의 양반 자제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오경석과 유홍기를 들 수 있습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서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해 밝은 인물이었고 유홍기는 의원으로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 신서를 연구한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견문과 개화당 결성
김옥균은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일본 메이지유신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진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김옥균이 이끈 정치그룹이었습니다. 이 그룹에는 그 이외에 홍영식, 박영효 형제, 서광범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개화당 혹은 독립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갑신정변: 3일 천하의 꿈과 좌절
정변의 배경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근대적 개혁을 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잡을 궁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의 군대가 있어 쉽지 않았습니다. 개화당은 충분한 군사력이 없었고, 또 정변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돈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의 전개
1884년 12월 우정국 준공 축하연 날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였습니다. 청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양반 지배체제 청산 등의 정령을 반포하는 개혁을 진행하였지만, 4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 박영효가 좌포도대장, 서광범이 우포도대장, 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령을 제정·발표하였습니다. 주요 개혁안에는 청국에 대한 종속 관계 청산,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 제정,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지조법 개혁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망명과 최후
일본 망명 시절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884년 12월 13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정변에 실패한 그와 그의 동지들을 푸대접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1886년 7월에 오가사와라섬에 강제로 연금했습니다. 연금에서 해방되어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로 들어가 실권자 리훙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습니다.
상하이에서의 암살
1894년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청국 상하이 호텔)으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냅니다. 3월 28일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인 마쓰모토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리볼버 권총을 발사하였습니다.
김옥균의 역사적 평가와 현재적 의미
복합적 평가
김옥균은 그 평가가 매우 복합적인 인물입니다. 그와 동시대를 산 유학자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를 "역적", 개화당을 "왜당"이라 불렀습니다. 반면에 박정희 정부 시절 국사관을 주도한 이선근 교수와 북한 초대 지도자 김일성은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구자'로 평가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재평가
현재까지도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호평이 남아 있어 '김옥균 연구 모임'이라는 일종의 팬클럽도 존재합니다. 일부에서는 김옥균을 조선의 사이고 다카모리로 보기도 하며, 그리고 한국의 김옥균 무덤보다 일본의 김옥균 무덤이 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새로 발견된 편지의 의미
이번에 영국에서 발견된 김옥균의 한글 편지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 독립 의지의 증거: 청나라 연호 대신 개국년도를 사용한 것은 조선의 독립 의지를 보여줍니다.
- 외교적 노력: 갑신정변 8개월 전에 영국의 협조를 얻으려 했던 구체적 증거입니다.
- 한글 사용의 의미: 외국 외교관에게 한글로 편지를 쓴 것은 민족 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냅니다.
- 국제적 시각: 조선 개화파가 단순히 일본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각적인 외교를 모색했음을 보여줍니다.
맺음말: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의 꿈
김옥균은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영국에서 발견된 한글 편지는 그가 단순한 친일파나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진정한 개혁가였음을 보여줍니다.
140년 만에 발견된 이 편지는 김옥균과 개화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는 소중한 사료입니다. 그들의 꿈과 좌절,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의지가 담긴 이 편지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지식인의 고민과 노력이 21세기 한국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